Reading/Novel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내가 사랑하는 소설

Sapientia373 2017. 7. 31. 17:32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중학생 때다. 이 책은 내가 처음으로 새벽에 잠을 참아가며 읽은 소설이고 처음으로 읽은 2권 이상으로 된 장편소설이다. 이번에 다시 읽었을 때 역시 그랬으며,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에 내 다른 주업을 거의 놓다 싶이 하고 읽었다. 흡입력 있는 스토리, 입체적으로 변하는 인물들, 그리고 전쟁이라는 인류의 숙명적인 아픔을 서술하는 이 책은 정말 말 그대로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한다. 


어렸을 때 읽었을 때에는 전쟁의 묘사 부분이 지루했고, 소설에서 너무 많은 부분을 차지해 쓸데 없이 소설을 길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 소설은 연애소설과 전쟁소설의 중간에서 밸런스를 잘 이루었고 그 점은 소설을 더 다채롭게 함과 동시에 더 폭넓은 독자를 끌 수 있게 하였다. 이 책은 전쟁소설이긴 하지만 전쟁을 직접적으로 겪은 남성의 시각이 아닌 전쟁을 간접적으로 겪은 여성들의 이야기다. 전쟁을 간접적으로 겪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겪은 고통은 남성이 겪은 고통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편과 애인과 가족을 잃은 여성들, 어떻게든 홀로 가족을 책임지고 살아남고 그 와중에 전통과 규범과 도덕을 지켜야 하는 여성들의 삶은 가혹하고 아프다. 스칼렛은 이 두가지 가치 중 극단적으로 생존이라는 가치에 치우친 인물이다. 즉 모든 스텟을 살아남기에 몰빵하여 친구들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듣다 결국에는 따돌림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를 유일하게 이해해주고 인정해주는 연인 레트 버틀러도 마찬가지로 살아남기에 더 몰두하지만 그래도 스칼렛과 달리 그에겐 버릴 수 없는 마지막 한가닥의 도덕심이 있었다. 그는 남부의 패전을 눈앞에 두고 입대를 하여 8개월간 군인으로 복무하기도 하고 북부의 뜨내기들과 백인 쓰레기라고 묘사된 인물들과 어울리지만 진심으로는 그들을 경멸한다. 그리고, 마침내 스칼렛과의 사이에서 딸 보니가 태어나자 그는 좋은 아버지,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일념하에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열성적인 민주당원이 된다. 그에게는 스칼렛에게 없는것 -- 자신의 자녀와 식솔과 마음을 나눈 친구들을 진정어린 마음으로 돌보아야 한다는 인정-- 이 있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책을 읽었을 때 보이지 않던 것이, 바로 스칼렛이 모성애라는 것은 눈꼽만큼도 없으며 몰인정하고 감정적으로 인색하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니 책의 후반부로 갈 수록 책을 던져버리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레트도 아주 좋은놈은 아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이용할까 두려워 일부러 빈정대고 비아냥거림으로써 그녀의 진심을 깨닫는데 본의 아니게 가장 큰 장애물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그녀를 잘 알고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보았지만 정작 어떻게 해야 그녀로 하여금 레트 본인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실패한 것이 되어버렸다. 

 물론 레트의 빈정거림과 독설은 스칼렛의 꼬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열과 성을 다해 사랑하는 여자가 쓸데 없는 망상에 사로 잡혀 별로 보잘것 없어 보이는,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전진할줄 모르는, 한심한 옛 신사에게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비참했을까. 더군다나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도 사랑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 식솔들이라는 현실적인 실체로 인해 마음을 붙들었던 것이 아니라 애슐리라는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꿈에 자신을 붙들고 결국 현실을 놓쳐버린 것이다. 


소설은 레트가 스칼렛을 떠나기로 한 곳에서 멈추지만, 난 그 이후에 스칼렛의 삶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그녀는 레트보다 덜 괴로워하며 자신의 과거를 이겨낼 것이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강하며 매우 긍정적이다. 애슐리라는 비현실적인 꿈은 레트가 다시 돌아오리라라는 비현실적인 꿈으로 대체될 것이다. 그녀는 그 꿈에 매달려 살아갈 것이고, 유일한 친구였던 멜라니가 죽어 매우 외롭겠지만 이제 다시 현실로 조금은 돌아가 자신의 자식들과 보우를 보며 어떻게든 또 악착같이 살아갈 것이다. 오히려 레트가 걱정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한 여자한테 너무나도 큰 상처를 받았고, 더 이상 기댈 희망이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나는 얼마간의 도덕과 규범을 포기할 수 있을까. 비록 지금은 여성이 하면 안 되는 일 이라는 딱지가 붙은 일은 거의 없어졌지만 도덕적으로 통용이 되지 않은 일이란 여전히 많다. 스칼렛 오하라가 그 많은 일을 겪고도 나이가 겨우 28이었다. 나는 그것보다도 어리고 순탄하게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하면서 내 안의 도덕성의 변화가 온 시기가 제법 있었다. 학생시절 역사를 배울 때에는 친일이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자신의 신념과 도덕을 돈과 안락에 팔아먹은 개 돼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요즘 다시, 생존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절한지 몇 개의 (간접) 경험으로 깨닫게 되었다. 왜 전쟁이 났을 때 자살하지 않고 그 험한 꼴을 당하고도 악착같이 살아가는지를 그 전엔 몰랐다. 나라면 전쟁이 나면 바로 첫날 죽길 바랄거라면서. 그러나, 삶에는 여러가지 이유와 의미가 있고, 그것들은 때때로 이성과 논리로는 이해도, 설명도 안 된다는 것을 2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드디어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에 나의 도덕성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데, 내가 얻은 결론이란 이런것이다. 도덕이란, 크게 보면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그 어떠한 형태로든. 사람들은 이것을 다만 물리적인 해라고 한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물리적인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은 도덕으로 가지 않고도 법에서 끝나는 경우가 더 많다. 즉, 한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으로서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지켜야하는 규범인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상대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것을 경계해야한다는 것이다. 요즘같이 대체로 평화로운 시국에서는 마음의 상처가 생각보다 크고 오랫동안 남아 있을수 있으므로.


나는 가끔씩 내가 상처를 주었던, 그리고 내게 생처를 주었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그 중엔 지금와서 생각하면 별거 아닌 것도 있고 지금와서 생각해도 가슴을 찌르는 것들이 있다. 나는 내가 삶에서 만났던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스칼렛처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생각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반추하고 후회하는 일을 줄이기 위해서는, 오늘부터라도 매일 아침 나의 좌우명과도 같은 이 신념을 기억하고 가슴에 새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