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와서 가장 서러운 순간을 굳이 뽑자면
내가 먹을 죽을 내가 끓이고 있을 때다.
한국에서 혼자 살 때 아프면 본죽이라도 사먹을텐데. 누가 사다주기라도 할텐데. 엄마랑 산다면 엄마가 끓여줄텐데.
오늘은 퇴근 후 저녁으로 일요일에 끓여놓은 카레와 닭가슴살을 해동해서 먹었다. 카레가 상한 것은 아닌 것 같고 닭가슴살도 냉동 상태였으니 아마 괜찮았을거다. 근데 그런 순간 있지 않나? 엄청 배가 고팠었는데 막상 음식이 나오면 별로 못 먹는 것. 배가 고파서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집에 와 카레를 스토브에 뎁히니 배가 거짓말처럼 하나도 안 고팠다. 그래도 처리해야지라는 생각에 먹는데, 몇 숟갈 안 떴는데 갑자기 배가 너무 아픈 거다. 아, 이거 알지. 이거 내가 스트레스 받을 때 약간 랜덤하게 찾아오는 급체같은 거다. 아직 위염까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요즘 스트레스성 위염 없는 사람이 있긴 한가?
건강하고 싶어서 강박적으로 운동을 한다. 더워서 밖에서 걷는게 무리라 걷는 양이 절반으로 뚝 줄긴 했다. 살이 찌는 것이 너무나도 싫어서 의식적으로 칼로리 조절을 하고, 간식을 안 먹으려고 노력한다. 아무도 나한테 살쪘다고 하지도 않고, 실제로도 아마 찌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에 비해 체중이 2키로 정도 늘었는데, 사실 근육도 많이 붙었다. 체지방을 거의 5퍼센트나 줄였다. 아마 수치상으로 나는 3년전에 비해 훨씬 건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말로 이전보다 건강한지 모르겠다.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고, 의욕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니 몸도 축 처지는 기분이다. 뭐든지 마음 먹기에 달려있다고들 하는데, 그 말을 뼈져리게 느끼고 있다. 의욕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사라진 의욕을 끌어올리는 것은 처음 시작보다 백배는 어려운 것 같다.
한국에서 친했던 교수님이 유학생활의 절반 정도는 도 닦는데 보낸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가면 나아지겠지, 라는 생각으로 버텼던 1-2년차.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시간이 지난만큼 새로운 어려움이 닥친다. 기본적으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 괴로워진다. 어, 벌써? 벌써 7월 중순이 다 되가? 나 이번 달에 뭐 했지? 아니, 그보다, 이번 학기에 뭘 했지?
난 에세이나 회고록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예전에는 사회적으로 저명하거나 꽤나 성공했던 사람들이나 에세이를 출간했기 때문이다. 혹은 그 자신이 작가라서 필력이 쩌시거나. 근데 최근에 우울증 환자들이 급증하고 전 국민이 스트레스와 스트레스성 질병으로 고통받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온갖 사람이 작가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에세이의 내용도 엄청나게 많이 바꼈다. 내용이 바꼈다기 보다는 주제가 바꼈다고 할까? 과거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성공했다"가 많았다면 요즘엔 "그냥 받아들이자. 그럼 나아져요."류의 책이 더 많은 것 같다. 2011년 최고의 유행어였던 "아프니깐 청춘이다". 그러나 이제 그 말 입 밖에 내뱉으면 엄청난 눈총을 견딜 수도 없을거다. 너나 청춘 하세요. 난 안 아프고 말렵니다.
이제 3년차가 끝났는데 아직도 도를 다 못 닦았다니. 5년 내내 닦아야 겨우 하나의 그릇이 완성되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완성이 되기는 하는 걸까? 심호흡을 하고, 글을 쓴다. 앞으로 글이라도 열심히 써야겠다. 이게 미드 한 시즌을 이틀만에 정주행하는 것 보다는 훨씬 훌륭하게 도를 닦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