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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 걸음

Sapientia373 2019. 7. 9. 05:14

며칠 전에 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하는데 오랜만에 아빠도 함께했다. 

아버지랑은 간간히 카톡만 주고받고 가족 단톡 방에서만 얘기하는데, 우연히 집에 계셔서 엄마와 통화할 때 함께 할 수 있었던 것. 

 

엄마와 달리 아빠는 내 리서치에 관심이 무지 많다. 엄마는 "연구 잘 돼가?" 이 정도로만 묻는 반면 아빠는 "주제가 뭐야? 아직 아무도 안 한 거야? 언제 다 써? 얼마나 썼어?" 등등 너무나 많은 질문을 퍼붓는다. 얼마나 썼냐니. 아직 라이팅은 들어갈 단계도 아닌데.

 

내 리서치의 근황은, 역시나 제자리 걸음. 다행인 건 그래도 제자리걸음 할 거리라도 있다는 것일까? 몇 달 전까지는 이걸로 뭘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는데 그래도 다행인 건 돌고 돌 무엇이라도 생겼다는 것이다. 

 

아빠가 제자리 걸음만 해서 어떡하냐길래 내가, "원래 제자리걸음 하다가 갑자기 잘못 내디뎌서 앞으로 가고 그러는 거야. 재수 없으면 뒷걸음질 치기도 하지만 재수가 있길 바라 줘 그냥."라고 답해버렸다. 내가 말하고도 오, 그런가? 하게 된 말. 

 

진짜 진짜 중요한 것은 저 제자리 걸음이라도 계속해야 앞으로 나갈 추진력이 생긴다는 것인데, 요즘 너무나 의욕이 없고 답답하기만 하다. 어디가 아픈 건 확실히 아닌 것 같은데 약간 무기력한 것 같고,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은 정말 긴데 나온 것은 없다. 대화할 사람도 없어져서 말도 잘 안 하고. 와, 몰랐는데 나 지금 무지하게 외로워하는 건가.

 

다른 사람과 고통을 논해봤자 그때 뿐이고, 그래 봤자 나아지는 것도 없는 넋두리기 때문에 그 마저도 이제 안 하게 된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종종 소식을 물으면, 그냥 "뭐 똑같지~ 잘 지내는 것 같아." 라며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한다. 나, 겉 보기엔 진짜 잘 지낸다. 학교도 매일 출근하고, 매일 운동도 한다. 유기농 마트에 가서 좋은 것만 먹으려고 하고, 감사하게도 여행할 기회도 많다. 혼자 살면서 집은 부족함 하나 없이 온갖 가구와 가전제품이 있다. 친구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종종 만나서 커피를 마시고 브런치를 함께할 정도는 된다. 작년에 나를 그렇게 괴롭히던 불면증도 이제 사라졌다. 운동하고 샤워하고 책 좀 읽다가 자면, 10분 만에 금방 잠이 든다고. 간간히 세일할 때 비상금 풀어서 옷이나 신발도 많이 샀다. 정말로, 겉으로는 남부러울 거 없는 유학생활 아닌가? 

 

그렇지만 누가 정말 잘 지내? 라고 한 마디만 물어본다면 그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나 사실은 몇 달째 제자리 걸음만 하는 거 같아.

나 사실은 끝까지 못 버틸까봐 무서워.

버티더라도 내가 가게 될 길이 내 길이 아닐까 봐 무서워.

 

그래도 긍정적으로 마무리를 짓는다면, 이 수백번의 제자리걸음이 내 다리를 더욱 단단하게 하고 있기를. 

수천번 삽질하다 보면, 뭐 누가 아나. 진짜 땅 속에 보물에 닿을지.

수천 걸음 제자리 걸음하다 보면 정말 내가 아빠한테 말한 대로 뿅하고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비록 내가 가고자 하던 곳은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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