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의 소설은 술술 읽히면서도 그저 소비하는 글이 아닌 스스로 하여금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생산적인 문학이란 데서 나는 항상 감탄하곤 했다.
중학생 시절, 뭔가 멋져보이는 제목과 "온몸을 칼로 그었어" 라는 자극적인 소재로 시작한 이 소설을 처음 읽었다.
그 때만해도, 에이, 우리 엄마 세대니깐 이렇게 살았던 거지.
요즘 누가 이렇게 살아. 난 나중에 자라서 당연히 맞벌이 하고 남편이 나 두고 바람피면 바로 이혼해 버릴꺼야.
라는 생각이었다.
앞선 세대에 대한 연민과 호기심과 약간의 반감과 함께, (순전히 강동원의 팬이기 때문에 봤던) 영화 우행시의 감동으로 인해, 그리고 술술 읽히는 그 특유의 힘 있는 필체로 며칠만에 아주 금방 읽었던 책으로 기억한다.
이 책을 다시 읽게 된 것은, 생각보다 잘 안 읽히는 한 영어 소설을 읽다가 짜증이 나서도 있고,
동네 도서관의 외국 서적 코너에 우연히도 이 소설이 정말 뜬금없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학교 도서관에도 공작가의 책이 몇 개 있었다. 빌려볼까 하다가도 그 때는 바빠서 못 읽었지만)
10년도 넘게 전에 읽은 책이었지만 시작과 결말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소설.
그리고 10년도 넘게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답답하고 분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성감별 낙태가 가장 만연했던 시기에 태어났다.
공작가는 우리 엄마랑 나이가 거의 비슷하고, 우리 엄마도 스물 다섯에 결혼을 해 서른 하나의 나이에 자신의 출산 이력을 모두 마쳤으니, 정확히 이 세대를 살아간 여성일 것이다.
나는 아들이 없는 집에서 태어났고 약간 특이하면서도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진 우리 부모님은 (특히 엄마는) 셋째를 가지려고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뭐 셋째는 아들일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 내가 아는한 우리 부모님은 성감별 낙태를 하실 분들도 아니기도 하고.
우리 엄마는 가끔 목욕탕에 혼자 가시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아들이 없어서 심심하겠네' 라는 소리를 했지만, 직접적으로 '아들이 하나는 있었어야 하는데' 라든지, 자기가 아들이 없어서 기가 죽었었다든지 이런 소리는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둘쨰도 딸이었을 때 친할머니가 '쓸데없이 딸만 둘이어서 어떡해' 라는 말을 하셨을 때 버럭 소리를 질렀다는 둥, 정말 과도기 세대의 평범한 며느리들이 하지 않을 일들을 자랑스럽게 내게 들려주었다.
나는 아들이 없던 집에서 자란 덕분에 그다지 차별을 당한 적도 없고,
엄마가 '여자는 시집 잘 가면 그만이야' 라고 전근대적인 발언을 하며 이상한 가치관을 심어준 적도 없다.
아빠는 엄마가 언니는 교대나 사대를 가면 좋겠다는 말을 했을 때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선생같은거 해서 뭐하냐고.
성적을 맞춰서 간호대 수시를 넣는게 어떻냐는 말을 내게 한 적도 있었는데, 그 때도 아버지는 화를 내셨다.
교사나 간호사를 모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나는 자라면서 여자라고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느냐라는 제법 근대적인 가치관과, 아들이 없으니 너희들이 집의 기둥이라는 약각은 전근대적이지만 그래도 아들이 없으니 기둥이 없다보다는 백만배는 나은 세미 근대적인 가치관이 섞인 집안에서 자랐다.
그렇지만 나는 시대와 사회가 준 고정관념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벗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는 것이 맞을까.
고등학교 때, 꿈이 현모양처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친구가 반에 있었다. 그 때는 뭐 저런 미친년이 다 있지? 2000년대 중반을 훨씬 넘어서고 있는데 저 집 엄마는 딸이 그렇게 말하면 무슨 기분이 들까? 라는 생각이 들고...
서른줄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은,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말하는 친구를 욕할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지금 한창 뜨거운 남녀 갈등과 페미니즘/꼴페미 논쟁과는 거리가 멀다.
그냥 뭐랄까, 그냥 우리 세대, 그리고 나보다 5살 정도 위의 나이의 사람들이 가진 과도기적인 가치관의 한계라는 생각이 든다고나 할까.
우리 세대 여자들은, "여자도 남자 못지 않아요" 라는 약간은 수동적인 슬로건과 "여자가 남자보다 오히려 뛰어나다" 라는 자의식 과잉의 슬로건에 둘러쌓여 자랐지만 그렇지만 동시에 직장인 엄마보다는 전업 주부엄마를 흔하게 둔 세대다.
우리의 그 엄마들은 어땠냐 하면, 직장인 엄마는 엄마가 직장을 다녀서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남자는 절대 갖지 않는 이상한 죄책감을 갖고 있던 엄마들이었고, 고학력 여성보다는 저학력 여성의 노동참여율이 월등히 높았던 세대고, 직장인 엄만데 종일 파출부를 둘 정도로 여유롭지 못할 경우엔 집안일도 대부분 자기 몫이 었던 엄마들이었고, 물론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남편이 돈을 좀만 더 잘 벌면 바로 그만둘거라고 입에 달고사는 엄마들이었고. 하여간, 지금이랑은 좀 많이 달랐던 시대란 말이다.
많은 남자들이 요즘 우리나라 여자들은 "여자는 남자보다 뛰어나다"라는 알파걸이라고 우기지만 군대도 안가고, 돈도 더 못 벌고, 결혼은 하고 싶어하고, 근데 집은 안 해오고, 남자는 집 해가느라 몇 억씩 빚도 지고 고생하지만 여자는 기껏 몇 천만원 혼수 채우는 것이 다고, 근데 그거 가지고도 징징징대고, 그러니 한국 김치녀들이랑은 결혼 안 한다 라는 상당히 자극적이고 원론적인 말을 많이 한다.
군대와 임금격차는 뭐 제도적인 문제도 크니 차치하더라도, 결혼 가치관에 대한 불일치는, 글쎄. 그게 과연 여성들을 비난할 문제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약간 그렇게 교육 받았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도 선생님 중에 "여자애가 얼굴도 못 생긴게 공부만 잘하면 뭐하냐" 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 뱉는 선생도 있었다 (심지어 도덕이었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여자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잌이라는 오래된 농담을 4학번 위의 남자 선배한테 들었다. 스물 다섯만 넘어가면 명절날 너는 결혼 언제하니 라는 소리를 듣고, 안 할려고요~ 라고 농담조로 말하면 저거저거 까져가지고 라는 말도 안되는 비난을 듣고.
무엇보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꾸 자기 얘기를 하면서 우리 때는 결혼 잘 하는게 최고였어. 라는 말을 해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0년-15년전에는 통용되던 가치관이었으니깐. 세상이 그 동안 변한 것에 비해 여성들의 가치관은 그렇게까지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것 뿐이다.
24살엔 아 결혼 같은 것 안하고 혼자 살아야지 생각하던 친구들이 30이 다 되어가니 약간 급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하는 대로 살게 내비두었던 부모도 여성에게는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동조하는 친구들이 생기면서 여자들은 동요하기 시작한다. 아 나도 따라가야하나, 말아야하나.
나는 아직 동조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동요하며 동조하는 친구들을 힐난하고 비난할 생각은 더 이상 없다.
그들은 나약하거나, 줏대 없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인간이며, 그렇기 때문에 안정을 바라고 조금 더 알려진 삶의 전형을 따르려고 하는 것 뿐이다.
이 소설은, 혜완과 그의 친구들이 31살의 나이에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2018년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기분이다. +10살 하면 비슷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혜완은 김지영보다 20살 위고, 혜완이 31살을 살아가는 시기는 1992년이지만 김지영은 2015년 언저리를 살아가고 있다.
가만보면 그 둘은 참 닮아있다.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바람을 피면서 여자가 참아주고 이해해주길 바라는 그 전근대적인 가치관은 많이 사라졌지만,
남자에 비해 여자는 부수적인 존재이고, 더 많은 인내와 이해심을 요구하는 존재라는 면에서는 참 많이 닮아있다.
나의 세대는 어떨까. 나의 30대 중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을 띠고 있을까?